국가부도의 날 VS 빅쇼트 



영화 국가부도의 날을 보니 자연스럽게 영화 빅쇼트가 떠오른다. 1997년 한국의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와 2008년 미국의 금융위기를 다룬 영화니 비교가 될 수 밖에 없다. 빅쇼트가 이성적이고 냉철하게 접근했다면 국가부도의 날은 한국식 신파 한스푼을 넣어서 좀 더 감정적으로 접근한다. 


김혜수가 영화 미스 슬로운의 제시카 차스테인처럼 울지도 흥분하지도 않고 더 냉철한 캐릭터였다면 어땠을까? 

빅쇼트가 아주 친절한 영화라면 국가부도의 날은 불친절한 영화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IMF시대를 다 겪어왔으니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과연 10대들도 IMF에 대해 자세히 알까? 빅쇼트는 혹시나 관객들이 못 알아들을까봐 보드게임인 젠가나 카지노를 예를 들어서 아주 쉽게 설명해주는데 국가부도의 날은 유아인에게 IMF가 뭐냐는 질문을 하지만 그것도 모르냐며 그냥 넘어간다. 



IMF 외환위기가 일어난 이유 


1985년 플라자 합의 



1985년 9월 22일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일본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들이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달러를 약세로, 엔화를 강세하기로 합의한다. 싸고 좋은 품질로 수출 강세를 보이던 일본을 잡기위한 미국의 조치였다. 이는 엔화가치를 올려 일본 제품을 비싸게 하여 수출을 어렵게 하고 달러가치를 내려 미국제품을 싸게 수입하도록 하여 미국의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합의였다. 

20분 만에 이루어진 플라자 합의 직후 일주일간 엔화가 8.8% 하락한다. 그 이후 일본은 수출이 급속도로 위축되어 '잃어버린 10년' 이라는 경제 불황이 시작된다. 금리인하를 통해 경제 성장을 도모하지만 부동산 버블 붐만 일어난다. 마이너스 금리까지 도입하지만 경제는 살아나지 않는다. 



수출 활성화 


당시 우리나라는 미국 달러에 고정환율제를 적용하고 있었다. 플라자 합의로 엔화가치가 상승하자 우리나라 수출이 더욱 활성화 되게 된다. 

1980년대 중반부터 1996년까지 대한민국은 아시아의 네마리용(한국, 대만, 홍콩, 싱가포르)이라 불리우며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고 OECD에 가입하게된다.  



1995년 역플라자합의 


1995년 4월 18일 선진국 7개국이 일본의 금융위기가 세계 금융위기로 번질 수 있으니 달러가치를 다시 올리기로 정책을 변경하게 된다. 이는 표면적인 이유이고 미국의 실질적인 이유는 달러 약세에도 무역 적자가 해소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는 태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대한민국 등 아시아 국가들의 외환위기를 불러오게 된다. 



아시아 외환위기 



1980년 후반 미국의 저금리와 달러 약세가 계속되자 투자자들은 수익률이 낮은 미국 시장보다 고금리인 동아시아 국가로 몰렸다. 그래서 외국인의 직접 투자로 동남아 국가들이 경제가 급성장하게 된다. 그러나 1995년 역플라자 합의로 달러가 강세로 바뀌면서 외국인 투자자들이 동아시아에 투자했던 돈을 달러로 바꿔 회수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1997년 7월 태국 바트화가 몰락하면서 태국 외환위기가 터진다. 태국을 시작으로 홍콩, 필리핀, 대만 등 동아시아 전체에 외환위기가 닥친다.  



외환위기 직전의 대한민국의 상황


기업들의 부채비율 증가 


30대 재벌 그룹의 1996년 말 부채비율은 386%

1년 뒤 ↓

1997년 말 부채비율은 518%


대기업의 문어발 확장으로 빚잔치로 기업을 이끌어 간 것이다. 



환율방어를 위해 외환보유고 소진 


김영삼 정부는 국민소득 1만 달러를 유지하기 위해 환율시장에 개입하여 수시로 다량의 외화를 시중에 방출하였다. 1997년 10월 말 외환보유고는 305억 달러였으나 환율 방어를 위해 2달 동안 100억 달러를 써버린다. 12월 말에는 204억 달러가 되었다. 



단기외채 상환 불가 


해외은행은 만기 1년 미만의 단기 자본을 한국의 은행, 종합금융사에 많이 빌려주었다. 단기 자본의 만기가 계속 연장될 것이라 믿고 이를 장기 대출로 기업들에게 빌려주게된다. 아시아 금융위기로 해외은행이 이제 더이상 만기 연장안되니 빨리 돈을 갚으라고 하는데 갚을 외화가 없는 것이다. 

이 때 단기외채의 규모는 1,700억 달러로 당시 외환 보유고의 5배였다. 



1997년 IMF 외환위기 


1997년 10월 24일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장기 : AA- → A+

단기 : A1+ → A1 



대기업 연쇄 부도 


1997년 1월 30일 한보철강 부도

1997년 3월 19일 삼미그룹 부도

1997년 4월 21일 진로그룹 부도

1997년 5월 15일 삼립식품 부도

1997년 5월 30일 한신공영 부도

1997년 7월 15일 기아그룹 부도유예협약 

1997년 8월 26일 대농그룹 부도 (미도파만 회생)

1997년 10월 15일 쌍방울 부도

1997년 10월 16일 태영정밀 부도유예협약 

1997년 11월 1일 해태그룹 부도

1997년 11월 4일 뉴코아 부도


1997년 11월 10일 1달러 1,000원 돌파 

1997년 11월 16일 IMF 총재 극비리 방문 



1997년 11월 21일 IMF 구제금융 요청 


IMF는 한국이 합의한 조건을 제대로 이행하는지 감독하기 위해 2달동안 2주마다 점검했다. 그리고 분기별로 철저한 심사기준으로 진척 상황을 평가했다. 


< IMF의 협상 조건 >

1. 부실금융기관 폐쇄 

2. 금리 인상

3. 정부지원 금지 

4. 대량 정리해고 

5. 금융시장 개방 : 외국인 주식투자 한도 확대 

6. 노동시장의 유연성 : 비정규직, 계약직, 쉬운 해고 



1997년 11월 25일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장기 : A+ → A-

단기 : A1 → A2 



1997년 12월 3일 협상 타결 555억 달러 구제금융 승인 


1997년 12월 5일 고려증권 부도 

1997년 12월 6일 한라그룹 등 부도 

1997년 12월 6일 대우그룹 쌍용자동차 인수 



1997년 12월 11일 S&P사 한국 국가신용등급 하향조정 

장기 : A- → BBB-


1997년 12월 12일 동서증권 부도 

1997년 12월 23일 달러당 1,995원 사상 최고 

1997년 12월 27일 청구그룹 화의신청 

1998년 1월 14일 나산그룹(현 인디에프)

1998년 1월 18일 극동건설 화의신청 

1998년 1월 30일 삼양식품 화의신청 

1998년 2월 1일 파스퇴르 화의신청 


1998년 2월 25일 제 15대 김대중 대통령 취임 


1998년 3월 7일 단국대학교 부도 

1998년 3월 18일 미도파 부도 

1998년 5월 12일 거평그룹 부도 

1998년 5월 18일 동아그룹 해체, 동아건설만 회생 

대우그룹 해체, 대우자동차 부도 

2000년 11월 1일 현대건설 최종부도 모면 

2001년 5월 11일 동아그룹 해체 



금모으기 운동 



1997년 11월 20일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에서 처음으로 금모으기 운동이 시작되었다. 새마을 금모으기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1998년 1월 5일부터 각 방송사들이 금모으기 캠페인을 방송하기 시작했다. 전국민이 가지고 있던 금을 내놓기위해 은행에 줄을 섰다. 1998년 1월부터 4월까지 모인 금의 양은 약 225.79t이다. 금모으기 운동 이전의 금 보유량은 10톤 정도였는데 20배가 넘는 금이 4개월만에 모인 것이다. 

금수출로 벌어온 외화는 기업의 부채를 갚는데 쓰였다. 국민들이 금 모으기 운동을 하는 동안 대기업들은 금 도매업체들과 짜고 탈세를 했다. 이 사실이 2008년에 들어났지만 공소시효가 지나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2001년 8월 23일 IMF 법정관리체제 종료  


블로그 이미지

hongya

,